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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세종이 사랑한 천재 과학자, 장영실

by Suyeon79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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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

천재 과학자, 장영실

 세종시대 과학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단연 장영실이었습니다. 세종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대단했다고 한들 장영실이 없었다면 그 열정을 현실화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조선시대가 사대부 중심의 사회였던 만큼 천민 출신이었던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동래현에서 관노 생활을 하던 중 그 재주가 출중하여 천거되었습니다. 「세종실록」에 여진족에서 붙잡혀 있던 중국의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탈출하여 조정의 대접을 받고 관기(官妓)를 아내로 삼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부류의 인물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장영실은 아버지를 통해 중국의 선진 기술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관기인 탓에 관노 신분으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비록 신분은 노비였으나 그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여 태종 대에 이미 재능을 인정받아 궁궐에서 일했고 과학 기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뛰어난 기술자를 물색하고 있던 세종의 눈에 띄어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술관료로 발탁되었습니다. 장영실은 기술관료로 발탁된 뒤 은밀히 중국에 파견되어 선진 기술을 익혔다고 전해집니다. 중국에서 그는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넓혔고 귀국 후에는 궁중 기술자로 머물며 본격적인 기술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뛰어난 재능 덕분에 그는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免賤)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게 됩니다.

 

물시계와 해시계

장영실이 가장 먼저 만든 발명품은 물시계였습니다. 이는 중국의 물시계를 모방한 것으로 완벽한 자동시계는 아니었지만 물시계의 개발 덕분에 장영실은 정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으로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 14년에 천문 관측기인 간의대 조성 작업을 주도했으며 이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 별자리표와 방위지정표로 구성된 정방안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우주관 중의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혼천설은 우주는 둥근 원으로 얽혀 있고 지구는 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둥근 원이라는 뜻으로, 곧 지구 구형설을 뜻하는 것입니다. 혼상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만들어져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것입니다. 이 어설퍼 보이는 천문 관측기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습니다. 장영실의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입니다. 해시계를 일구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앙부일구란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마치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앙부일구가 위대한 점은 그것이 반구(半球)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학자들이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태양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해시계의 발달은 물시계의 발달도 촉진시켰습니다. 해시계는 밝은 낮의 시간만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비가 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물시계입니다. 장영실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스스로 종을 치는 물방울' 시계, 즉 자격루를 만들었습니다.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는 동시에 시간을 알리는 목각 인형이 솟아올라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라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롭게 고안한 것이었고 장영실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대호군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 제작 외에도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하여 갑인자와 인쇄기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영실은 조선의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으며 세종시대 찬란한 과학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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