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세종의 쌍두마차, 황희와 맹사성

by Suyeon79 2023. 4. 13.
반응형

경복궁 근정전

세종의 쌍두마차

 조선사를 통틀어 황희와 맹사성에 비견할 만한 재상이 또 있을까 싶어질 정도로 이들은 세종대에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세종 시대는 세종이라는 마부가 황희와 맹사성이라는 두 마리 말을 끌고 달려가는 쌍두마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철저한 선비이자 뛰어난 재상, 관리의 모범이었다. 황희는 1363년 개성에서 태어나 14세에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 23세에 진사시,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균관학록에 제수(除授: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습니다. 맹사성은 충청도 온양 출신으로 역시 2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문과 을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습니다.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 많고 관직에도 3년 먼저 올랐습니다.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실록에서 태종은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하였으며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전해질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희는 태종 시절에 이조판서에 올랐습니다. 맹사성도 황희 못지않게 조선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습니다. 황희가 고려가 망한 후 은거한 것과 달리 맹사성은 태조로부터 예조의랑직을 제수받는 등 관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태종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한 번씩 파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408년 맹사성은 대사헌으로 있으며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알리지 않고 부마(駙馬:임금의 사위)인 조대림을 고문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맹사성은 왕족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3년간 관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황희는 1418년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세종 4년이 되어서야 관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432년에 이르러 황희는 영의정부사, 맹사성은 좌의정을 맡았습니다. 이때의 조선은 재상이 주도하는 내각 정치의 틀을 다녀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황희와 맹사성은 이런 정치 분위기를 주도하며 관리의 기강을 세우고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조정하며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쳐나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듯, 다른 듯

황희와 맹사성은 정치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개인의 품성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황희가 분명하고 정확하고 강직한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한 예술가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군사에 관한 일), 이조(관리의 시험과 상벌에 관한 일)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국가의 의례에 관한 일), 공조(건축물, 도기 주조 등에 관한 일)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이들의 이러한 차이점은 세종의 왕도정치 구현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세종은 이 두 재상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여 때로는 강력한 정치력을, 때로는 부드럽고 온후한 정치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세종의 중용의 태도는 세종 시대를 조선 역사상 가장 발전되고 안락한 시대로 만드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세종 시대를 풍미하며 이름을 떨쳤던 두 재상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79세의 나이로 온양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됨됨이가 매우 소탈하고 조용하며 온화하여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방문해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대했고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습니다. 야사에는 그의 됨됨이와 청렴을 칭송하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황희는 조선의 재상 중 가장 장수했던 사람입니다. 1449년 스스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87세까지도 영의정 자리에 있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하였고 세종 후 문종 치세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1438년 맹사성이 죽고 황희는 14년을 더 살아가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사리에 밝았으며 공사(公私)의 처리가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인정 많은 좋은 선비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뇌물 사건, 사위 서달의 살인을 은폐하려다 탄핵받은 일 등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긴 몇몇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명재상으로서의 황희의 뛰어난 능력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