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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폐비의 아들 · 희대의 폭군, 연산

by Suyeon79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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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단청

 왕자 융, 어떻게 세자가 되었나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자신을 스스로 군자(君子: 유교 사회에서 덕성과 교양을 겸비한 인격자)라 칭했으나 한편으로는 호기(豪氣: 호방하고 씩씩한 기운)가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달하는 자식을 얻었는데 그런 호방한 기운이 불행의 씨앗을 낳았으니 그것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습니다. 한 때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왕비 윤 씨는 성종이 다른 여인들과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왕 주변의 후궁들을 독살할 목적으로 비상(砒霜: 비석을 태우고 승화시켜서 만든 서리 같은 결정체의 독약)을 숨겼다가 발각되어 이 일로 빈으로 강등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윤 씨는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지는 않았지만 왕을 가까이하는 여인들에 대한 그녀의 질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성종이 궁을 빠져나와 규방을 출입하는 일이 잦아지며 왕비 윤 씨가 질투심에 이기지 못해 만백성의 어버이 격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중전으로부터 용안(龍顔: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도 체통이지만 당시 법도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비 윤 씨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고개를 들었으나 대부분의 신하들을 폐비에 대한 언급을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윤 씨는 왕비이자 다음 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이기도 했으니 함부로 폐비론을 내세웠다가 다음 왕의 보복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수대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폐비론을 굽히지 않았고 여기에 한명회 등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힘을 더했습니다. 이에 성종은 일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씨를 폐비시키게 되고 사가(私家: 개인의 살림집)로 폐출된 윤 씨는 서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윤 씨가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융(후의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생겨나며 대신 간에 폐비 윤 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습니다. 동정론의 논리는 폐비 윤 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폐비 윤 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 후궁들과 모의하여 '윤 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하는 빛이 없다'는 거짓 정보를 성종에게 알렸고 이에 격분한 성종은 급기야 윤 씨에게 사약(賜藥: 임금이 내리는 독약)을 내리게 됩니다.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賜死: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던 일)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납니다. 윤 씨가 폐출될 당시 융은 4살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성종은 폐비 윤 씨에 대한 언급을 일체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자신의 생모인 윤 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 씨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습니다. 정현왕후와 융은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정(情)이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를 별로 따르지 않았고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는 갖은 애정을 표현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융에게는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으니 이것이 어린 융의 가슴에 분노의 씨앗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 탓인지 융은 어린 시절부터 결코 순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독단적인 성격에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종은 이런 융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결국 융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자 융의 일화 두 가지

성종과 주변 사람들이 세자의 포악한 성격을 우려했던 일화가 야사(野史: 정식 역사가가 아닌 야인들이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를 통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성종이 어느 날 융에게 임금의 도리를 가르치려고 불렀는데 왕의 부름을 받고 다가가던 융의 옷과 손등을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갑자기 핥았던 것입니다. 그 사슴은 사실 성종이 매우 아끼던 애완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융은 그 사슴이 자신의 옷과 몸을 더럽힌 것에 격분하여 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고 이를 본 성종 역시 몹시 화를 내며 융을 꾸짖었다 합니다. 성종이 승하하고 왕으로 등극한 융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을 쏘아 죽여버렸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융과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입니다. 융에게는 두 스승이 있었는데 허침과 조지서입니다. 허침과 조지서는 당시 명망(名望: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성과 덕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성격은 매우 대조적이었으니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 있는 사람인 데 반해 조지서는 매우 깐깐하고 엄격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융은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기에 장난기도 많고 자주 수업 시간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에 조지서는 융에게 걸핏하면 그 사실을 왕에게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반면 허침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습니다. 융은 당연히 허침은 좋아했으나 조지서는 싫어했고 결국 자신이 왕위에 오른 뒤 조지서를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 두 가지 일화를 통해 세자 융은 매우 집요하고 독단적이며 반구저기(反求諸己: 돌이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다) 하는 일 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위협하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 포악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세자 융이 바로 폐비 윤 씨의 아들이자 희대의 폭군으로 전해지는 연산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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