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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의 태평성대, 성종시대

by Suyeon79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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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옥 창호

성종 초기, 할머니의 섭정 

 성종 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습니다. 무엇보다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치세에 매우 능했는데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 정치를 실현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로 모든 기초를 완성했다는 뜻의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얻었습니다. 그만큼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아들 의경 세자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의경 세자가 죽고 세조의 손에 의해 키워졌는데 인품이 뛰어나고 활쏘기, 서화 등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뇌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변 사람들이 놀라 혼비백산하였는데 성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조가 이 모습을 보고 기상과 학식이 뛰어난 이가 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합니다. 성종은 다섯 살 되던 1461년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열한 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1469년 숙부인 예종이 죽고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까지 7년간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정희왕후의 7년간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종 즉위 직후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감시를 줄였습니다.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완료했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화장(火葬) 풍습을 없애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외촌 6촌 이내의 결혼을 금지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에 차별을 두었으며 전국 교생에게 「삼강행실」을 강습하게 하는 등 유교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각 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하여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대대적으로 목화밭을 조성하고 뽕나무 종자를 재배하도록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습니다. 이러한 유교문화 강화 정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성종은 어린 나이로 섭정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정사(政事)는 신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종의 치세

 하지만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나이 어린 임금이 등극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을 도와 정사를 돌봄)을 끝내고 성종이 권력을 쥐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성종은 우선 서무 결재에 원로들이 참여하던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들을 가까이하며 권신들을 견제했습니다. 1478년에는 참판 이하 모든 문신, 무신들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유자광 등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신진 세력들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며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고려 말 대표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들에게 녹을 주고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기존의 훈구 세력들을 견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세조 때의 공신들이 주축이었던 훈구 세력들은 일선에서 차차 후퇴하였고 신진 사림 세력은 근왕(勤王: 임금이나 왕실을 위해 부지런히 충성을 다함)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성종은 이러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으며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실례로 1489년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내기도 하고 승려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일정 수의 사찰만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도학적인 조예가 깊어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으며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관료들의 독서 저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이 이때 편찬되었습니다. 또 성종은 1479년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고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했는데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소탕하고 이 지역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조선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했으며 백성들은 건국 이래 가장 태평 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밝은 빛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이 생기듯 이런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서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는데 성종 자신 역시 후기에는 유흥에 빠졌고 이것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지게 됩니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그녀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성종 후대에 이러한 병폐가 옥에 티처럼 남아있긴 하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과 백성들이 누렸던 가장 태평 성대했던 시절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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