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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연산군 폭정의 결정판, 무오사화 · 갑자사화

by Suyeon79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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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집권 초기 연산군

연산군은 성종과 숙의 윤 씨의 아들로 윤 씨가 왕비에 책봉되자 연산군에 책봉되었습니다. 1479년 윤 씨가 폐비가 된 후 1483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고 1494년 성종이 죽자 열아홉에 조선 제10대 왕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19세에 섭정(攝政: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임금을 도와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를 때가 12월이었으니 며칠만 지나면 성년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1494년 12월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4년 뒤인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폭군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즉위 초에는 성종 대의 평화로운 모습이 계속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에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 4년간은 오히려 성종 말기의 퇴폐 풍조와 부패를 남김없이 쓸어내는 기간이었습니다.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족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하게 하여 변방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문화면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 왕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평화롭기만 할 것 같던 이 4년 동안 연산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림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연산군에게 간언하고 학문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배척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 세력들이 붙게 됩니다.

 

무오사화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해에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극돈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의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를 발견한 것입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글인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를 표하는 제문의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킨 것을 비유한 것으로 은근히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이극돈에 대한 상소문은 세조 비 정희왕후의 상중(喪中)에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들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초에 실린 것을 발견한 이극돈을 격노했으며 즉시 유자광의 집으로 달려갔으니 유자광 역시 김종직과는 극심하게 대립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유자광은 이극돈이 보여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 곧 훈신 세력과 모의하여 연산군에게 전대의 왕인 세조를 비방한 글을 쓴 김종직은 대역무도한 죄인이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이 눈엣가시였던 연산군은 즉시 김일손을 불러 죄를 물었으니 연산군이 원하는 대답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은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대답이었고 원하던 진술을 받아낸 연산군은 김일손을 비롯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부관참시(剖棺斬屍: 이미 죽은 이를 무덤에서 꺼내어 그 시신을 다시 한번 참수하는 극형)가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등은 세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凌遲處斬: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인다는 뜻의 형벌) 등이 내려졌습니다. 이극돈은 수사관(修史官: 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발견하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면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어나 유배당하고 실록 작업의 당상관이었던 이극돈마저 파면되었지만 「조의제문」의 존재를 연산군에게 알렸던 유자광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으로 화를 입었던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하였습니다.

 

갑자사화

이제 사림도 완전히 제거된 마당에 연산군에게 간언하는 이도,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으며 그의 곁에는 한결같이 감언이설(甘言利說: 상대방을 현혹하는 달콤하고 이로운 말)하는 간신들만 가득했습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습니다. 매일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뽑아 올린 아름다운 기생들이 그 연회에 동원되었습니다. 연산군의 사치로 국가 재정은 점점 거덜 나기 시작했고 이것을 기회로 삼은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고가 비어간다는 것을 인지한 연산군이 이제는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반납할 것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고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자 대신들은 왕에게 지나친 향락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궁중파와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는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에 반발하고 나섰고 궁중파는 왕의 의도대로 하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립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임사홍이었습니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에 의해 탄핵받아 귀양을 간 일이 있었고 이에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하들 사이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남아있던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를 위해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 씨 사건을 이용하게 됩니다. 임사홍에 의해 자신의 친모인 윤 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격노하여 엄청난 살인극을 벌이게 됩니다. 윤 씨 폐위와 사사(賜死: 죄인에게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함)에 찬성했던 이들은 사형당하고 이미 죽은 이들 역시 부관참시에 처해지게 되며 이 밖에도 많은 이들에게 연좌죄까지 씌워져 관련자들의 가족, 자녀들까지 화를 입게 됩니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잔인함까지도 이 전의 무오사화에 견줄 바가 못 되었습니다갑자사화 이후 자신에게 제동을 걸 세력을 모두 제거한 연산군의 폭정을 더욱 노골화되었고 그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한글 투서가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었습니다. 이에 성종 시대부터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인 성희안이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 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청했고 이에 정현왕후는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으로 보내고 이튿날 진성대군의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11년 9개월의 연산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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