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일컬으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고 하며 통상적으론 1,2차를 합해 임진왜란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대의 조선은 약 2백년 간 거의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기 떄문에 불시의 전쟁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왜국의 상황은 조선과 달랐으니 당시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시간 지속되던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하나의 나라로 통일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시대를 통해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확보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했고 서양에서 건너온 새로운 무기였던 조총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갖추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반면 수많은 영웅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까지도 난세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이순신과 곽재우가 있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시대 최고의 영웅, 이순신
이순신은 이정의 네 아들 중 셋째로 이순신의 형제들은 돌림자 신(臣) 자 앞에 모두 삼황오제 중 복희씨, 요, 순, 우임금을 순서대로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첫째부터 희신, 요신, 순신, 우신 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이순신은 문반 집안이었지만 그는 28세 되던 1572년 무인 선발 시험에 응시했고 이때는 낙마, 4년 뒤인 1576년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삭직(削職: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했지만 1591년 47세 되던 해 전라좌수사가 됩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곧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했으며 군량 확보를 위한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대비를 갖추던 중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전란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전쟁을 위한 태세를 갖추고 상황을 분석한 뒤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85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하였습니다. 이때 한산도에서 원균과 만나 연합 함대를 조성하고 7일 옥포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옥포에서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적선 26척을 격파했고 다음 날 고성의 적진포에서 다시 적선 13척을 궤멸(潰滅: 무너지거나 흩어져 없어지게 만듦)시켰습니다. 이후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받고 육지에 있던 왜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전멸시켰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진출시켰습니다. 그 후로도 이순신은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20척, 가덕도 부근에서 60여 척, 당시 왜군의 본거지였던 부산포에서 1백여 척의 왜선을 궤멸시키며 제해권(制海權: 무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여 군사, 통상, 항해 따위에 관하여 해상에서 가지는 권력)을 장악하여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하였습니다. 1594년부터 3년간은 일본과 명(明)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며 전쟁을 소강상태가 되었고 이 기간 동안 이순신은 군사 훈련, 군비 확충 등에 주력하며 왜적의 재침(再侵: 다시 침략함)에 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1597년 일본과 명나라 간의 회담이 결렬되고 왜군이 다시 침략을 감행했고 이때 이순신은 원균과 서인 세력의 모함으로 영어(囹圄: 죄인을 가두는 곳)의 몸이 되고 맙니다. 유성룡 등이 이순신에게 죄를 물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지만 선조는 이를 묵살하고 이순신을 삭직 시켜 백의종군하도록 합니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맡게 되었고 전술 능력이 부족했던 원균은 이순신이 그동안 키워놓았던 수군과 함대를 모두 잃고 자신도 전사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복귀시켰고 이순신은 12척의 함대로 명랑에서 적함 133척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명량해전으로 제해권을 되찾은 이순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수군을 회복했습니다. 이미 여러 전투를 통해 대패한 왜군은 1598년 함대 5백척을 끌고 노량으로 들어왔으며 결국 50여 척만이 겨우 탈출할 정도로 패했지만 이 전투에서 우리는 시대의 영웅 이순신을 잃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4세였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곽재우는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 정시 2등으로 뽑혔으나 그가 쓴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렸다 하여 합격이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곽재우는 벼슬을 포기하고 돈지(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에서 평생 은거할 결심을 하는데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그는 의병을 일으켜 대패한 관군을 대신해 싸우게 됩니다.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은 갖은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처음에는 수십 명에 불과하던 휘하 의병은 후에 2천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그 병력은 왜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뒤를 보호하였습니다. 그 공으로 1592년 7월 유곡찰방을 시작으로 형조정량에 오르는 여러 차례 벼슬에 오르고 귀향을 반복하다 1617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은 민족적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저항 의식을 고취시킨 사람들은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었습니다.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던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 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조선을 지키려는 이들은 의병과 같은 민중들이었습니다. '역시 민중은 강하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운의 왕 인조의 등극, 조선의 끝없는 변란 (0) | 2023.04.19 |
---|---|
광해군 시대에 핀 문화의 꽃, 허균과 허준 (0) | 2023.04.19 |
연산군 폭정의 결정판, 무오사화 · 갑자사화 (0) | 2023.04.16 |
폐비의 아들 · 희대의 폭군, 연산 (0) | 2023.04.15 |
조선의 태평성대, 성종시대 (0) | 2023.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