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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광해군 시대에 핀 문화의 꽃, 허균과 허준

by Suyeon79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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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조선시대 전시관

혁명을 꿈꾼 사상가, 허균

허균은 문장가로 이름 날렸던 허엽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허엽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갔으며 이에 허균은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서얼(庶孼: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과 그 자손)들이 겪는 고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이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허균의 집안 자체는 대단한 문장가로서 명망이 높았는데 그의 이복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한국 여류 문학의 대표자 격으로 뛰어난 문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문장가 집안의 출신답게 허균 역시 5세 때부터 글을 읽고 9세 때 작시했다고 합니다. 1594년 26세 때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從事官: 외교사절로서 정사와 부사를 수행하는 직책)이 되어 문장력과 학식을 인정받았으며 명나라 사신에게 누이인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주고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불교를 숭상한다거나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 파직을 당하거나 유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관직에 복귀하게 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어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오게 되는데 특히 두 번째 명나라 방문 때에는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하도록 하여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즈음 허균은 자신이 키워오던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서얼 차별을 없애고 신분 계급을 타파,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현실화 시키고자 했습니다. 이에 그의 수하들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도록 했으니 그 내용은 '북방의 여진족들이 쳐들어왔고 남쪽에는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의 섬을 점령하고 상륙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점차 백성들 사이로 퍼져갔고 남대문에까지 전란에 관한 방(榜: 어떤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이 붙자 전쟁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도성 안의 백성들 중 피난 가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허균은 민심이 더욱 동요되면 그 혼란을 틈타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의 계획은 그의 부하가 도성을 출입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발설하며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허균을 위시한 반란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허균은 능지처참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던 그 혁명가는 5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허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반면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 한국 문학사의 큰 획을 그은 대단한 업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을 건설하려 했고 현실에서도 이를 실천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혁명가적 사상은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편작, 허준


편작은 중국 삼황오제 시대의 명의로 여러 나라를 돌며 의학을 전수하고 수많은 이들을 치료하는 등 뛰어난 의술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런 편작에 버금하는 조선의 의술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동의보감」을 남긴 허준입니다. 허준은 1546년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서 내의원에 봉직(奉職: 나라나 사회를 위한 공직에서 일함)하게 됩니다. 어의로 활동하며 허준은 많은 공적을 세웠는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그 뒤로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어의로서 내의원의 의료와 관련된 모든 행정에 참여하며 왕의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1596년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여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뒤 선조는 허준에게 단독으로 편집일을 맡도록 명하였고 광해군 2년인 1610년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됩니다. 「동의보감」은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의학 백과사전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허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생활 속에서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였습니다. 특히 「동의보감」에서 주목할 점은 각 병의 항목이 병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동의보감」은 의사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이 책 한 권으로 고금의 의서들을 모두 열람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뛰어난 편집력과 서술력을 인정받아 일본과 중국으로까지 전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한방 임상의학서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저서로 「동의보감」만큼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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