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숙종과 희빈 장씨, 그리고 그의 아들 경종

by Suyeon79 2023. 4. 20.
반응형

조선시대 궁궐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 명의 왕비를 맞이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한 명도 얻지 못했습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준 이는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었는데 나인(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내명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의 숙빈 최씨가 그들이었습니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윤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금이었습니다. 그 둘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습니다. 왕자 윤은 14세 되는 1701년 친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습니다. 아버지 숙종이 어머니에게 사사(賜死: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하는 것을 본 이후 그때부터 병을 얻었습니다. 이때 윤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이 사건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렸고 후사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그에게 후사가 없었던 것이 희빈 장씨 때문이라고 합니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였고 숙종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세자를 데려오자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가 아들의 하초(下焦: 삼초의 하나, 배꼽 아래 부위에 해당)를 움켜쥐고 잡아당겼고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었던 후부터 늘 시름시름 앓으며 후사도 남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희빈 장씨, 장옥정

장옥정은 어린 시절에 궁궐에 들어가 궁녀가 되었고 22세 되던 1680년 숙종의 승은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에 경신환국(경신년에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이 일어나 남인이 대거 쫓겨나게 되었고 그녀의 후원자였던 장현도 유배되면서 그 여파로 장옥정도 숙종의 모후(母后: 임금의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죽자 1686년 궁으로 복귀하였고 그해에 정식으로 후궁의 반열에 올랐으며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왕자를 낳으며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숙종이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리며 후사를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689년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데 반발했던 서인들을 조정에서 대거 몰아냈고 서인의 거두(頭: 영향력이 크며 주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였던 송시열이 사사되는데 이를 기사환국(1689년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기사환국 이후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려고 했으나 남아있던 서인 몇몇이 이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참혹한 형벌을 받은 후 파직되었고 이후 조정에서의 남인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남인의 힘이 너무 강해지자 숙종은 은근히 남인을 경계했고 폐위시켰던 민비를 복위하여 서인을 등용하려는 생각마저 가지게 됩니다. 당시 숙종은 왕비였던 장옥정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에게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인의 세력 팽창을 염려하고 있던 숙종은 중전에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위시키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 사사되었던 송시열 등이 복작되었고 남인은 정계에서 대거 퇴출당하게 됩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에 숙빈 최씨의 고변에 의해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고 숙종은 격노하여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으니 이를 '무고의 옥'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궁녀에게 후궁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장옥정의 생은 43세의 일기로 끝이 나게 됩니다.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

경종은 1688년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두 달 만인 1689년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로 정호 되었으며1690년 3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숙종은 1716년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 1717년 세자가 병약한 데다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의정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고 그해에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청정(세자를 대신하여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는 일)을 명했습니다. 연잉군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소론측이 반발하고 나섰고 그 때부터 세자 윤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게 됩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세자 윤은 1720년 숙종이 죽고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제2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경종 초기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그들은 경종이 너무나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경종은 노론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는데 노론의 요구사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제대로 주관할 수 없다며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노론 측은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소론 측은 경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세게 반발하니 경종은 와병 중에 대리청정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거두기를 몇 차례 반복합니다.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죽은 경종 시대는 이처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늘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 생모의 죽음을 목전에서 목격하고 또 생모에 의해 생산 능력마저 상실한 채로 재위 기간을 병석에서만 보내던 경종은 4년 2개월 동안 뚜렷한 치적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37세의 일기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