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하나의 재주도 없는 사람은 없다." 이만큼 정조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구절이 또 있을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격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엇나갈 수도 있었을 듯한데 정조는 그 비극을 통해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 성찰을 바탕으로 조선사에 남을 성군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화정치를 꽃 피운 정조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산입니다. 8살의 나이에 세손에 책봉되었고 3년 뒤 1762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1775년에는 82세의 영조가 대리청정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양이 되었듯 정조 역시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 기간 동안 늘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며 살았고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이후 줄곧 가슴앓이만 했던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등을 제거했으며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즉위와 동시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인재를 끌어모았습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히 왕실 도서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규장각을 통해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 이로써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近衛: 임금을 가까이에서 호위함)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습니다. 1776년 설치된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장되었고 기능도 다양해졌습니다. 초기에는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평서 등의 업무를 하도록 하고 출판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습니다.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박제가 등 서얼 출신 학자를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개국 이래 능력과 학식을 뛰어나나 출셋길이 막혀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 중심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재주 없는 사람은 없으며 그 재주를 잘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사상이 여기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作成之化: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함)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워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구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정조의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당쟁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僻派: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침)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을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은 시파(時派: 시류에 영합함)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정조가 등용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 실학자 정약용, 북학파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습니다.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나라를 이끌어가자 조정은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벽파들은 위기감을 느껴 그들끼리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791년의 신해박해(천주교도 박해사건)을 기점으로 벽파가 힘을 서서히 회복하고 후에 정약용, 채제공 등 정조 측근 세력들이 수세에 몰리거나 죽게 되자 시파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조선시대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년 49세 되던 해 지병으로 앓던 종기가 도져 세상을 뜨게 됩니다. 이렇게 24년간의 정조의 문화정치는 막을 내렸으나 그는 양반, 중인, 서얼, 평민 모두가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정조의 소울메이트, 정약용
정약용의 삶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벼슬살이하던 제1기, 정권에서 밀려나 귀양살이하던 제2기,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제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기
정약용은 생원이 된 후 1789년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 합격하여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큰 배를 강에 나란히 띄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그리고 배다리를 준공했으며 수원성 축조에 동원되어 설계를 맡아 거중기를 제작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균관 직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왕의 특명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병조참의에도 오르고 곡산부사 생활을 하며 목민관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드러내며 군민들에게 추앙을 받게 됩니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오르는데 그가 요직에 오르는 것을 시기한 정적들이 그를 천주교인으로 몰며 고변하게 되고 이에 정약용은 자신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특히 서양의 과학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능한 천주교 신부와 신자를 만났을 뿐이라며 해명서와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제출합니다. 정조는 그를 달래서 조정에 머무르도록 하고자 했으나 정약용은 1800년 결국 사의하고 낙향, 정조의 재촉으로 잠시 상경했지만 그해 정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제2기
정조 사망 이후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1801년 신유사옥(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정약전, 정약종 등 정약용의 형제들이 투옥되고 정약용 역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독서와 창작에 몰두하고 그해 황사영의 백서사건(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유배 가게 됩니다. 유배지에서도 여러 곳은 떠돌다 다산에 있는 한 정자를 얻게 되었고 그 초당에 기거하며 '다산초당'이라 이름 붙이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1818년 유배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제3기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에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업적을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저작물을 남겼던 그는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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