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서조카, 인목대비의 서손자입니다. 1623년 3월 서인 세력과 함께 무력으로 난을 일으켜 조선 제16대 왕에 올랐으니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인조는 등극 초기 광해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자 했으나 시작이 순탄하지 못했던 만큼 안팎으로 여러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괄의 '삼일 천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것과 같은 반란이 또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는 동시에 와해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역모설을 퍼뜨려서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계파 간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물이 바로 '이괄의 난' 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조는 왕으로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힘든 싸움 끝에 난은 평정되었으나 조선의 국력을 쇠약해지고 사회는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괄의 난'에 대해서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論功行賞: 공적의 크고 작음 따위를 논의하여 그에 알맞은 상을 줌)에 대한 이괄의 개인적인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본다면 서인들의 세력다툼이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괄이 평안 병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조선에 위협을 가하던 때였습니다. 조선으로서는 변방의 방어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변방의 주력 부대 지휘관이었던 이괄에게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괄은 자신의 책무를 통감하고 그곳에서 군사 조련, 진영의 경비 강화 등 여진족의 갑작스러운 침략에 방어에 몰두하였습니다. 이괄이 변방의 수비에 총력을 다 하고 있을 때 중앙의 서인들이 이괄이 변방에서 군사 1만여 명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괄과 그의 아들 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인조에게 고변(告變: 반역 행위를 고발함)합니다. 인조는 이괄을 깊이 신임하고 있던 터라 역모에 대한 고변을 쉽게 믿지 않았지만 일단 조사관을 구성하여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였고 결국 이 고변은 무고(誣告: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김자점 등 당시의 집권 세력은 이괄을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여 국문(鞠問: 중죄인(重罪人)을 신문하던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조가 이를 묵살하자 이괄의 아들 이전 등을 중앙으로 불러 국문하는 것으로 협의하게 됩니다. 이괄은 자신의 아들이 역모 혐의를 쓰고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하는 날엔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아들을 잡아가기 위해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괄은 자신과 함께 역모 혐의를 쓰고 압송되던 한명련도 구출하여 반란에 가담시켰습니다. 이괄의 군대와 관군은 세 번의 전투를 벌였고 관군은 대패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한성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을 갔으며 이괄의 부대는 출군 19일 만에 한성에 도착하였고 즉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이 승리하여 새로운 왕(선조의 아들 흥안군)이 즉위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한성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관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됨으로써 이들은 결국 관군에게 투항하게 됩니다.
조선과 후금, 정묘호란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후인 1627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여진족은 조선 침략을 감행하게 됩니다. 관군과 반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싸움으로 이미 국력이 쇠해있던 조선으로서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이북을 점령당했다가 화의 조약을 맺어 위기를 겨우 벗어났습니다. 여진족은 명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0년 후금을 세웠습니다. 조선은 이미 친명 배금 정책을 통해 공공연히 명을 후원하며 후금과는 거리를 두었고 이것이 후금을 자극하여 결국 후금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조선 조성은 전세가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김상용으로 하여금 한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습니다. 결국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의 배후를 공격했고 후금군은 후방이 위협을 받자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게 됩니다. 이 조약(정묘약조)에서 조선의 입장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할 것이니 후금은 더 이상 조선을 침략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고 후금은 조선의 제의를 받아들여 철군하게 됩니다. 조선은 그동안 야만족으로 배척하던 여진족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굴욕적인 조치였을 뿐 아니라 후금에 대해 세폐(歲幣: 조선 시대 해마다 음력 10월에 중국에 보내던 공물)를 바쳐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으로서는 후금의 군사력을 막아낼 다른 방도가 없었으니 당시의 상황에서 이 조약은 성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세폐를 보내고 필수품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처음의 약속을 깨고 식량 공급과 병서 및 군사적 지원도 요구했으며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1636년부터는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하며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해왔습니다. 후금의 요구가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조약을 깨고 선전포고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났고 이런 가운데 후금이 일방적으로 맹약을 군신 관계로 바꾸고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강요하자 조정 대신들은 인조에게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간언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금의 사신들은 민가의 마필을 빌려 본국으로 도주하던 중 조선 조정의 유문을 보내 되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잡고 군비를 손실하라'는 내용이었던 즉 이것은 곧 후금을 치겠다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후금 태종에게 전해졌고 태종은 조선을 침략할 뜻을 굳히게 됩니다. (이때 후금을 국호를 청으로 개칭함) 결국 청 태종은 12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내려왔습니다. 청군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내려오자 조선 조정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고립무원에 빠진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회담을 하게 되는데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은 청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류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대해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공물을 보낼 것 등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런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층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對明) 사대주의(事大主義: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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