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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순조와 정순왕후, 그리고 홍경래의 난

by Suyeon79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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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반란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수빈 박 씨의 소생이며 이름은 공입니다.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정조 2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 해 6월 정도가 승하하자 7월,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일)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했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권력을 쥔 정순왕후는 친정 6촌 오빠를 이조참판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 한편 정조의 탕평을 보좌했던 인물들은 축출하여 벽파 정권을 수립합니다. 그리고 왕의 즉위를 공포(公布: 대중에게 널리 알림)하는 글에 척사(斥邪: 사악함을 물리침)를 내세웁니다. 이것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신 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천주교도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것은 유교 윤리를 계승한다는 명분뿐만 아니라 반대파를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조 1년에 정순왕후는 곧바로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발동시켰습니다. 오가작통법이란 본디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서로 범법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이 제도를 천주교도 색출 작업에 활용하여 서로 감시하고 천주교도가 있을 시 고발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색출되어 죽은 자가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 간 시파나 남인 인물로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세 형제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신유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유사옥' 또는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합니다.

 

순조의 친정(親政)

1804년 순조가 열다섯 되던 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그만둠으로써 순조의 친정(親政: 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약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난 뒤 1년 만에 죽게 되는데 벽파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후 국왕의 장인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 모시며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벽파가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은 김이익김이도 등 안동 김씨 문중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동 김씨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니 이들을 견제할 세력은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가문의 영달을 위한 전횡(專橫: 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며 정치 기강을 무너뜨리고 결국 왕조의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 백성의 재물을 탐내어 빼앗는,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의 전횡과 함께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더욱 심해지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

농민들의 민란은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마침내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 세도정권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혁파 등을 내세운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반란의 성격을 넘어 체재 변혁까지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습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중심 부대로 삼고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고 칭하며 각지에 격문을 띄웠습니다. 그들은 봉기군을 일으킨 지 열흘 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 없이 청천강(평안북도 서남부를 흐르는 강) 이북 10개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4개월 간 관군과 대치하다 1812년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이씨 왕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정치세력의 봉기를 내걸었던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홍경래의 난을 통해 농민층의 자각과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 시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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