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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정책의 변화 조선의 노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솔거노비(率居奴婢)는 상전에 집에 거주하며 노동력을 수탈당하는 노비입니다. 둘째, 외거노비(外居奴婢)는 상전과 거처를 따로 두고서 상전의 토지나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입니다. 셋째, 독립노비(獨立奴婢)는 상전이나 소속 관사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신공(身貢: 독립된 생활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가에 내는 공물)만 납부하는 노비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많았으나 후기로 가면서 독립노비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노비의 신분이 점차 상승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비제의 붕괴 현상 조선은 노비에게도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재산이 많은 노비는 자신 역시 노비를 부릴 수도 있었으며 경제적 부를 획득한 노비 중.. 2023. 4. 23.
이 세상에 하나의 재주도 없는 사람은 없다, 정조 "이 세상에 하나의 재주도 없는 사람은 없다." 이만큼 정조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구절이 또 있을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격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엇나갈 수도 있었을 듯한데 정조는 그 비극을 통해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 성찰을 바탕으로 조선사에 남을 성군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화정치를 꽃 피운 정조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산입니다. 8살의 나이에 세손에 책봉되었고 3년 뒤 1762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1775년에는 82세의 영조가 대리청정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2023. 4. 22.
비극적인 父子의 이야기, 영조와 사도세자 완벽주의자 영조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무수리 출신 화경 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 이후 연잉군은 봉해졌으며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하였고 경종 1년에는 왕세제에 책봉되었습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사화(신축년과 임인년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싸움으로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됨)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領袖: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인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노론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니 이것.. 2023. 4. 21.
숙종과 희빈 장씨, 그리고 그의 아들 경종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 명의 왕비를 맞이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한 명도 얻지 못했습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준 이는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었는데 나인(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내명부를 통틀어 이르는 말)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의 숙빈 최씨가 그들이었습니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윤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금이었습니다. 그 둘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습니다. 왕자 윤은 14세 되는 1701년 친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습니다. 아버지 숙종이 어머니에게 사사(賜死: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하는 것을 본 이후 그때부터 병을 얻었습니다. 이때 윤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이 사건 이후 줄곧 병환..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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